장례이야기

[이달의 보훈] 5·18의 주역, 윤상원 열사의 흔적을 좇다

[이달의 보훈] 5·18의 주역, 윤상원 열사의 흔적을 좇다

2020. 6. 11.

2020. 6. 11.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습니다. (1)

 

 

 

오늘 하루,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혹시 기억나시나요?

많은 분이 오늘도 평범한 아침을

보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020년 5월 18일,

광주 전역에는 사이렌이 울려퍼졌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정확히 40주년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시민이 희생된 날이 40년이 흘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김없이 5월이 다시 온 것입니다.

오늘 광주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렸습니다.

이 포스팅으로 소개드릴 윤상원 열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윤상원 열사의 '영혼 결혼식'에

쓰이기 위해 작곡된 노래인데요.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윤상원 열사와 그의 아내 박기순은 민주화 운동으로 돌아가신 후에야 영혼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영혼으로나마 결혼해야 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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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참혹함, 언론이 외면한 현실을 알리고자

<투사회보>

중심 인물로 활동하다

 

5·18 당시, 모든 언론이

광주의 현실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윤상원 열사는 정확한 정보와 현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주고

외부에 전달하기 위해

'투사회보'를 제안하였습니다.

 

이 회보는 하루에 5~6천 장을

제작해 배포되었는데요,

광주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회보를 몰래 숨겨서

시민들에게 배포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투사회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시민들은 투사회보 제작자들에게 몰래

금전적 지원을 해주기도 하고, 물품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점차 격해지며

투사회보도 또한 활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투사회보의 영향력은 민주화 운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중심에서 윤상원 열사가 있었습니다.

 


 

'매우 인상 깊은

눈빛을 가진 젊은이',

외신 기자가 기록한 윤상원 열사

 

“이제 여러분은 집에 돌아가십시오. 가서 여러분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들의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계엄군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들 도청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그는 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시민들의 귀가를 설득하고,

그는 직접 항쟁의 중심으로 나섰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회견이었고, 외신기자들 앞에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27일, 시민군만이 남아있던 도청에서 윤상원 열사는

복부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윤상원 열사를 광주의 상징이자 시대의 들불, 영원한 시민군 대변인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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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5월입니다. 벚꽃이 졌고 여름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또 벚꽃은 피고 여름은 갈테지요.

5·18의 얘기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시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는

신고가 아직도 242명에 달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잘잘못이 규명되지 않고,

재판이 진행중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시 한 번 더 5월이 오기 전에는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5월이 왔을 때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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